*스포일러 안내아래에 해당하는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스테판's Movie Story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잘 정리해 두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블로거분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 원작인 "테레즈 라캥"과 "박쥐"를 읽을 생각이 있다.
- 원작인 "테레즈 라캥"만 읽을 것이다.
- "박쥐"를 보지 않을 것이다.
- 박찬욱 감독은 "박쥐"에서 대중적으로 실패햇으므로 다음 영화에서는 좀 더 고려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과의 "박쥐" 특별상영회 후기
박쥐를 한번 더 보았다.
금요일에 집에 내려가는 차편이 심야에나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강변 CGV에서 시간을 1분 1초를 맞춰가며 다시 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토막 토막 쓸 수 밖에 없다. 박쥐라는 영화에 대해 쓰려면, 몇 페이지라도 할애를 해야할 지도 모르고, 단 한 줄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과는...
박쥐를 이야기하려면,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복수는 나의 것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박쥐는 두 영화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박찬욱은 대중들에게 그리 친절한 편은 못될 것이다. 대중이 기호라는 경계를 친 채 극장에 들어왔을 때, 그 경계를 깨주는 것이 영화 감독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박쥐에서는 여러 면에서 그런 경계를 깨 주는 아주 좋은 영화이다.
원작 "테레즈 라캥"
이 영화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느슨하게 원작으로 삼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야기의 구조적인 면과 캐릭터 같은 설정은 그대로 사용했다. 라캥 부인는 라(나)여사로 테레즈가 태주가 되고, 까미유가 강우가 된다. 목요일의 모임은 수요일로 옮겼고, 철도 사무소는 '물'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 댐으로 옮겨졌다. 그 외의 인물들은 이름이 바뀌었고 역할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특히, 상현은 앞으로 해도 상현 뒤로 해도 상현인 현상현이 되었는데, 이는 기본 틀에서 변화를 주는 새로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테레즈 라캥에서는 욕망과 죄의식에 대한 심리 묘사가 아주 치밀하게 되어 있다. 사실, "박쥐"에서는 장면 위주로 설명을 해 나가는데,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테레즈 라캥의 대목들이 빈틈을 메우는 신기한 느낌도 들었다.
섹스
이 영화에서는 섹스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실제 섹스의 행위는 삽입보다는 액체의 교환에 더 중점을 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도발적인 장면은 상현이 태주의 발가락을 입에 넣고, 태주가 상현의 손가락을 입에 넣는 장면일 것이다. 뭉뚝하고 끈적하게 때리는 소리로서 표현하는 이 장면은 그 다음의 상현이 태주를 깨무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다른 여자들도 이래요?'하는 태주의 첫경험을 암시하는 듣한 대화로 이어진다. 나중에 상현이 호각소녀를 강간하려다가 축 늘어진 성기를 노출하는 장면에서는 섹스라는 것이 끝이 난다. 상현에게 남은 마지막 쾌락은 그렇게 끝이 난다. 사제에서 힘이 빠진 몇 센치의 존재로 전락한 그의 등 뒤로 돌이 던져지는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상현의 도덕성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액체
영어 제목인 Thirst가 말해주듯, 이 영화에서 액체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망할 정도로 액체에 대한 사운드는 강조된다. 피와 땀, 물침대, 오아시스, 댐, 수요일, 술 등 영화 곳곳에서 액체가 소품으로 쓰인다. 특히, 엠마뉴엘 수도원에서도 아주 건조한 벽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피를 토하는 행위는 그렇게 습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피의 맛을 보고 쾌락을 본격적으로 갈구하기 시작하면서, 액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부터 물은 강우와 라여사로 대표되는 죄의식과 금기를, 피는 쾌락을 의미하는 듯 등장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뭔가 마시는 소리를 거북스러울 정도로 크게 표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대한 바다위에서 건조하게 타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섹스
이 영화에서는 섹스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실제 섹스의 행위는 삽입보다는 액체의 교환에 더 중점을 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도발적인 장면은 상현이 태주의 발가락을 입에 넣고, 태주가 상현의 손가락을 입에 넣는 장면일 것이다. 뭉뚝하고 끈적하게 때리는 소리로서 표현하는 이 장면은 그 다음의 상현이 태주를 깨무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다른 여자들도 이래요?'하는 태주의 첫경험을 암시하는 듣한 대화로 이어진다. 나중에 상현이 호각소녀를 강간하려다가 축 늘어진 성기를 노출하는 장면에서는 섹스라는 것이 끝이 난다. 상현에게 남은 마지막 쾌락은 그렇게 끝이 난다. 사제에서 힘이 빠진 몇 센치의 존재로 전락한 그의 등 뒤로 돌이 던져지는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상현의 도덕성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액체
영어 제목인 Thirst가 말해주듯, 이 영화에서 액체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망할 정도로 액체에 대한 사운드는 강조된다. 피와 땀, 물침대, 오아시스, 댐, 수요일, 술 등 영화 곳곳에서 액체가 소품으로 쓰인다. 특히, 엠마뉴엘 수도원에서도 아주 건조한 벽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피를 토하는 행위는 그렇게 습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피의 맛을 보고 쾌락을 본격적으로 갈구하기 시작하면서, 액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부터 물은 강우와 라여사로 대표되는 죄의식과 금기를, 피는 쾌락을 의미하는 듯 등장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뭔가 마시는 소리를 거북스러울 정도로 크게 표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대한 바다위에서 건조하게 타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상현은 왜
상현이라는 신부의 "당근이죠."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순교를 위시한 자살행위를 하러 간 상현이 뱀파이어 바이러스가 든 걸로 추정되는 피를 수혈받게 된다. 이전까지는 남을 위해서 살아 오던(온다고 생각하던) 상현은 그 순간부터 "모든 쾌락을 갈구"하게 된다.
박찬욱의 박쥐
이 영화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생각할 거리가 풍부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박쥐란 영화는 박찬욱으로서 더 이상 올드보이의 수상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에 대한 변주를 벗어날 수 있는 전환점 같은 영화같다. 영화 이외의 것들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박찬욱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다 더 잘 이해하려면 박찬욱의 전작들을 한번 더 챙겨보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다시 한 번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그러면 감독이 이야기하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에 대한 변명
예전에 학교 영문학 수업 시간에 비평으로 유명한 교수님이 올드 보이에 대한 혹평을 내리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품위 없고 잔인한 화면을 한국의 대표적 영화라고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겠다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좋은 것만 보여야 한다는 그분의 생각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배신감을 느끼던 때가 생각이 난다. 나는 좋지 않은 영화보다 더 안 좋은 습관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자신있게 나누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가 불쾌감을 조장할수도 있고, 시대의 윤리를 거스를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러한 것들에 시대착오적인 혹은 본인의 착오적인 잣대가 드리워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박찬욱이 대단한 이유는 그러한 잣대에서 자유로운 노력을 하고, 영화를 만들어 두고 관객에게 이야기할 통로를 마련하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앞뒤가 막힌 완결적인 구도에서 선과 악과 원인과 결과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과 귀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머리속에서 다시금 조합될 때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박찬욱은 그런 시도에 대해 아주 관대하게 풍부한 텍스트를 만들어준다. 흡사,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 훈계하기 보다는 조용히 가방에 생각할 거리가 있는 책을 넣어주듯이 말이다. 나는 박쥐에 대한 섣부른 인터넷상의 우려들만큼은 다시한 번 더 생각했으면 한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될 영화 혹은 쉽게 이야기할만한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은 하나님의 장기이다'는 아마 우리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상현의 행동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종교라는 옷을 입었지만 이성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인간의 특성을 상현은 너무나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던 건지도 모른다. 십계명이 금지한 것들을 어기고 자신의 쾌락을 쫓는 상현은 항변하듯 "수혈하는 피를 제가 고른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사제의 순교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뱀파이어가 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이다. 갈수록 이 영화의 이야기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존재의 이유는..."의 문장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제 기도는 잘 듣습니다.'
박찬욱의 박쥐
이 영화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생각할 거리가 풍부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박쥐란 영화는 박찬욱으로서 더 이상 올드보이의 수상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에 대한 변주를 벗어날 수 있는 전환점 같은 영화같다. 영화 이외의 것들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박찬욱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다 더 잘 이해하려면 박찬욱의 전작들을 한번 더 챙겨보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다시 한 번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그러면 감독이 이야기하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에 대한 변명
예전에 학교 영문학 수업 시간에 비평으로 유명한 교수님이 올드 보이에 대한 혹평을 내리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품위 없고 잔인한 화면을 한국의 대표적 영화라고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겠다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좋은 것만 보여야 한다는 그분의 생각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배신감을 느끼던 때가 생각이 난다. 나는 좋지 않은 영화보다 더 안 좋은 습관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자신있게 나누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가 불쾌감을 조장할수도 있고, 시대의 윤리를 거스를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러한 것들에 시대착오적인 혹은 본인의 착오적인 잣대가 드리워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박찬욱이 대단한 이유는 그러한 잣대에서 자유로운 노력을 하고, 영화를 만들어 두고 관객에게 이야기할 통로를 마련하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앞뒤가 막힌 완결적인 구도에서 선과 악과 원인과 결과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과 귀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머리속에서 다시금 조합될 때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박찬욱은 그런 시도에 대해 아주 관대하게 풍부한 텍스트를 만들어준다. 흡사,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 훈계하기 보다는 조용히 가방에 생각할 거리가 있는 책을 넣어주듯이 말이다. 나는 박쥐에 대한 섣부른 인터넷상의 우려들만큼은 다시한 번 더 생각했으면 한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될 영화 혹은 쉽게 이야기할만한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