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아이맥스관까지 가서 그것도 막차시간 아슬아슬하게 보러가는 관객이라면, 그것도 1편을 번이상 아이맥스로 관람했다면 이 영화에 대한 소감은 재미있다일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1편과는 차이가 보인다. 1편은 '변신로봇'이라는 빛바랠대로 빛바랜 애들 장난감 이야기를 범우주적 블록버스터로 만들어낸 노력이 있었다면 2편은 트랜스포머라는 프랜차이즈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뭐든 X2라는 1+1 행사같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길이는 좀 더 길어졌고, 액션 장면의 수도 늘어났고 로봇의 수도 늘어났다.
문제는 점점 다이하드 4.0같은 다른 종류의 영화들과도 비슷해질 정도로 플롯이나 소재가 일반화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샘이 새로 진학한 대학에서 룸메이트를 만나고 이들이 해커들이고 닷컴 구루들이다가 전작 섹터 7의 요원을 만나러 가는 과정은 다이하드 4.0에서 해커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 너무 비슷하다. 로봇이 나오지 않는 장면은 다른 재난/테러물과 거의 차이가 없고, 로봇이 나오는 장면은 터미네이터의 신작시리즈가 떠오른다. 산업적으로 검증된 장치를 쓰는 것이지만, 점점 클리셰(cliche)가 되풀이 되는 건 문제가 있다.

눈 앞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로봇 변신쇼를 보러 간 거기 때문에 사실 딴 건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플롯이야 너무 명확해서 이미 대충은 알고 있는 것이었고, 더 유치해진 대사들이야 그냥 넘어갈 만 했다. 로봇들은 무수하게 많이 나오는데 하스브로에서 피규어와 장난감 라인업을 완벽하게 출시할 것이므로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다.

긴 상영시간동안 넘치는 듯한 로봇액션을 선보여서 후반부에는 지칠 정도이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대충 끝내는 듯한 결말은 살짝 실망스러웠다. 메건 폭스의 연기는 1편보단 확실히 존재감이 있고 자신의 장점을 잘 이용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샤이아 라보프는 몸을 사리지 않는 혼신의 연기를 선보이는데 아마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큰 배우가 될 것 같다. 그 외의 조연들은 주어진 연기를 충실히 했지만, 눈여겨 보지 않은 관객들은 누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 피곤하게 떠드는 것 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영화상품이며, 헐리웃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충실히 따르는 제품이다. 전편에 비해서 더 영혼은 줄어들었고, 장치만 늘었더래도 그리 불만은 없다. 이를 테면 포르노를 보면 어떻게 만났고 헤어지고 하는 내용이 가끔 재미있고 잘 만들었을 수는 있지만 본래 목적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처럼 이 영화도 철저하게 로봇쇼로서의 역할을 다 해내고 있다. 1에서 부족한 듯 빨리 지나갔던 로봇 변신 장면은 2에서는 유감없이 제공해 주므로 그것 하나는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트랜스포머2를 보면서 IMAX 2D 디지털 리마스터링 형태와 일부 장면의 아이맥스 촬영은 아마 헐리웃 액션 블록버스터에서는 일반적인 제작방식이 될 듯 하다. HD화질의 다운로드 영화에 극장이 경쟁하는 방법으로서는 나쁘진 않은 듯.
아마 올 해 최고의 공포 영화 두 편이 아닐까 한다. 편 다 장르를 비트는 묘한 재주가 있다. 두 영화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로 공포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 두편은 영화로서 명쾌한 플롯을 보여주는데다가 스토리도 재미가 있고 캐릭터간 균형도 적절했던 것 같다. 특히 '호러'나 '스릴러'같은 장르를 표방할 때는 장르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플롯이나 캐릭터의 균형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 두 영화는 원래 표방하는 장르를 비틀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뼈대를 온전히 살려낸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영화는 사람의 두려움을 아주 잘 파고들기 때문에, 나 같은 겁많은 사람은 눈가리고 귀를 가려도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마더는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호러에 가까운 영화이다. 봉준호 영화중에 가장 어두웠던 채색과 분위기가 지배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다크 버전쯤 될법한 이 영화는 끊임없이 배반하고 의심하고 의지해야 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들판의 춤사위로 시작해서, 관광버스 댄스로 끝나는 이 영화의 압권인 장면은 작두장면과 관광버스 춤사위 이다. 작두 장면때문에 영화 끝날때까지 가슴을 졸이고 공포에 떨면서 봤던 것 같다. 박찬욱같이 놀래키는 방식은 아닌데, 서서히 신경을 갉아 먹는 느낌이었다.
마더는 한국 영화 혹은 봉준호 감독 영화의 흐름에서 볼 때 영화가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방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배우, 원작, 마케팅 포인트, 감독의 유명세 등 외부적인 요인을 벗어나 이 영화가 어떤 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보여지더라도 안의 깊이를 전달할 수 있는 독립적인 텍스트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래그 미 투 헬은 호러를 비틀어 코미디를 채웠지만, 그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굉장히 쿨한 영화이다. 감독은 흡사 월미도 타가디스코에 관객들을 태우고는 '자 눈물빠지게 무섭죠?', '이제 웃겨서 눈물 빠집니다.'하는 등의 능숙한 조작을 가한다. 수치심고 양심, 선과 악, 피해와 보상 등의 원초적인 감정의 계산을 정교하게 캐릭터마다 배치해서 어찌보면 결말이 예상이 가더라도 끝까지 확인하고 싶게끔하는 점도 탁월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유머 코드를 빼면 완벽한 호러 영화의 플롯이 나온다. 호러와 유머를 줄이면 판타지 영화가, 호러와 판타지를 비틀어 코미디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장르라는 장치를 마음대로 유유히 오가며 만든 유쾌하면서도 오싹하고 멋진 영화이다.

* 최근에 읽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비밀"이란 책은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서사의 방식으로 제시한다. 서사의 법칙은 놀랍게도 아직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책에서 보여준 잘 되는 이야기의 플롯구조와 캐릭터 구성, 그리고 플롯을 복잡화 하는 기법 등 모든 것들이 이 두 영화에 살아있는 듯 했다.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참고할 만한 텍스트들이다.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무라카미 하루키요. 아아...

자, 여기서 문제! 아아...는 어떤 감정의 표현일까요? 틱틱틱틱 땡.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해서 포스팅 하자면 따로 블로그를 하나 더 열어도 될 정도이지만, 그래봤자 수다밖에 없을 것이므로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두 가지 희소식이 전해졌다. 노르웨이의 숲이 영화화 된다는 소식과 신작장편 소설인 1Q84의 일본 출간 소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영화

상실의 시대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센세이션이 되다 못해, 아직도 할머니댁 가는 시골의 작은 편의점에도 팔 정도로 스테디 셀러가 되었다. 이렇게 일본문학의 전설이 된 이 책의 불가사의는 "왜 아직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라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왕가위 영화들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영상미가 고스란히 문자로 전해지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어떤 영화감독이라도 탐을 낼 만한 이야기이다. 씨클로를 만든 트란 안 홍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 바벨의 말 못하는 소녀가 나오코를 맡았다. 와타나베 토오루는 데스노트L의 배우라고 한다.
사실 국내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바이준과 청춘을 통해서 영화화된 일이 있지만 원작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1Q84

아마 길이와 알려진 내용을 보면 해변의 카프카와 태엽갑는 새 연대기를 섞어놓은 듯한 소설이 될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묘사를 주로 하지만, 작품 곳곳에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성찰이 들어가 있다. 해변의 카프카는 그런 시대와 사회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태엽갑는 새 연대기(국내에서는 태엽감는 새)는 중간에 전쟁 장면에 대한 긴 묘사가 나온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내용으로 잔인성과 폭력성이 일부 있다. 사실 이 부분을 아직도 제대로 읽지는 못했는데, 영어판으로 읽다 보니 영미권 독자들을 위해서는 얇은 해설서도 나와 있다는 것을 찾게 되었다. 1Q84를 기다리면서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얼마 전 다시 읽기를 시작해서 1/3쯤 진행되었다.

웰컴백 무라카미 하루키!
트위터는 샌 프란시스코의 브라이언트 거리쪽에서 시작된 웹 서비스로, 인터넷의 SMS로 불리며 최근 엄청난 인기를 보이고 있다. 샌 프란시스코의 남서쪽에 있는 브라이언트 거리는 작년에 교환학생 때 잠시 지나간 적이 있었다. 샌 프란시스코로 놀러갈 때는 한국학생들 모르게 몰래 광역전철을 타고 다녀서, 낮에 햇빛이 포근하게 내리쬐는 기분을 혼자 만끽하며 거리를 걷곤 했다. 에너지FM이란 라디오 방송국의 한정판 티셔츠를 사러 걸어가던 그 때, 베스트 바이가 있던, endup이라는 클럽과도 가까이 있었을 법한 브라이언트 거리 한켠에서는 트위터의 서비스가 분주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트위터는 리서치 단계라고 한다. 어떻게 돈을 벌 지도 모를 이 서비스는 현재 인터넷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서비스가 되었다. 나는 트위터를 생각하면, 아름답고 포근한 샌 프란시스코의 풍경이 떠 오른다. 그곳은 겉으로만 봐서는 최첨단과는 거리가 먼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최신 애플 제품의 발표를 듣기 위해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굉장하 컬러풀한 분위기가 섞이는 독특한 곳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트위터라는 서비스는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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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www.virtualbirdseye.com



지금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트위터에 관심이 몰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한국의 인터넷은 발전하는 인프라에 걸맞지 않는 규제와 상업주의로 인한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터넷은 가치를 빛내기도 전에 가입자 유치 리베이트 이십만원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을 지도 모른다. 트위터가 묻는 것은 아이디와 비밀번호 정도이다. 그 후에 트위터를 즐기기 위해서는, 심지어 트위터 홈페이지(twitter.com)에 접속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트위터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아주 단순하다. 어쩔때는 에러 메시지를 그냥 토해내기도 한다. 트위터에는 사진을 올리는 공간도 없고, 댓글을 정리해주는 방식도 없다. 모든 것은 그냥 140자 짜리 한줄의 글로 나열된다. 시간의 순서로 나열되는 글에는 @트위터아이디 하는 식으로 누구와 관계되었다는 간단한 식별자와 #키워드 라는 단순한 그룹화가 있다. 검색 기능도 없던 것을 최근에 어떤 회사를 인수하면서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트위터의 커뮤니케이션은 '광장에서 외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SMS로 보내듯, 어딘가로 생각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보내면, 하늘에 구름처럼 둥실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구름들은 서로 뭉치거나 흩어지거나, 길게 이어지거나 한다. 물론, 화창한 날씨처럼 구름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분좋게 낮잠을 자거나, 밥을 먹고, 트위터는 잠시 쉬고 있을 것이다.

나는 트위터 서비스가 한국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환영하고, 더 활발한 활동이 있었으면 한다. 한국에서는 한 동안 광장의 문화가 없었다. 공개된 장소에서의 집단적인 행동이란 '시위'라는 인식이 있었고, 2002년 월드컵 응원을 계기로 찾았던 듯한 광장은, 다시금 규제와 법규로 인해 없어졌다. 대신, 곳에는 랜드마크라 불리는 구조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어디에도 개방적인 공기는 찾기가 힘들다.

트위터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가 광장에서 소리치는 이야기들을 모은 것과 같다. 따른다(Follow)는 개념은 너와 내가 서로 손을 맞잡아도 되고, 아니면 내가 너를 향해서만 소리 쳐도 된다. 그 어떤 활동에도 제약은 없다. 여기 저기서 어제 먹은 저녁이야기를 하다가도, 누군가 서거하신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크게 외쳐도 된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몰려들 것이고, 그 상황이 못마땅한 사람은 광장의 다른 한 켠으로 움직일 것이다. 트위터가 다른 점은 이러한 생각들이 의미를 지닌 텍스트로 쌓인다는 것일 것이다.

블로그의 엔트리로 대표되는 퍼머링크를 가진 하나의 글과 카페나 커뮤니티에 올라가거나, 쪽지와 이메일로 주고 받은 커뮤니케이션은 누군가를 향한 경우가 많다. 글을 쓰는 행위를 열고, 닫는 동안 일정한 형식에 의해 이야기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구축하고 신경써야 할 시스템이 있다.

트위터는 그런 면에서 아주 자유로운 매체이다. 그냥 일단 쓰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이 쌓여 간다. 비록 그것이 아주 짧은 140자의 글이라도 좋다. 긴 내용은 어딘가에다 쓰거나, 누군가의 링크를 가져다가 7자 이내의 링크 축소 서비스(Tiny URL같은)로 줄여서 덧붙이면 된다. 굳이 트위터가 아니라도, 하이퍼링크를 통해 무한대의 것들을 광장으로 들고 나올수가 있다.

실제로 트위터의 API 목록을 보면 무한대로 서비스가 확장이 가능하다. (참고 : 윈도용 트위터 앱 목록 http://twitter.pbworks.com/WindowsApps, 맥용 http://twitter.pbworks.com/MacApps) 특히, 어플리케이션과 웹, 웹 어플리케이션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트위터의 고향인 샌 프란시스코는 지역내 교통정보를 트위터를 이용해 중계하고 있다.

트위터는 중심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무심코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게도 없고 형체도 없는 외침에 불과할 지 모른다. 하지만, 웹은 그런 외침의 의미를 찾아내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트위터는 링크와 구글의 세계로만 존재하던 인터넷에 광활한 광장이라는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미투데이와 플레이톡을 써 본 경험으로는 이 두 서비스는 사용자간의 관계를 더욱 중시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둘 다 '댓글'이라는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가입과 지인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용하구요. 반면에 트위터는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냥 계속해서 보여주는 역할에 충실합니다.

*플레이톡과 미투데이는 트위터와 유사하지만, 트위터 만큼의 파급력을 가져올 지는 미지수 입니다. 둘 다 폐쇄적인 특징이 있고, 특히 미투데이는 네이버에서 인수함으로서 싸이월드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토씨(Tossi)의 경우 마이크로블로깅으로 시작하여, 최근에는 텀블로그같은 중간 길이의 블로깅에 위치 기반의 서비스를 합친듯한 느낌이 듭니다. 토씨는 너무 통신사와 결합되어 있어서 큰 서비스로 될 지도 미지수이구요. 왜 SKT는 싸이월드에 토씨를 합치지 않았을까요?



태그 :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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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한겨레21, 출처: 한겨레21


나에게 정치라는 문제와 계급이라는 문제에 대한 의식이 생긴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었고, 헤이워드라는 작은 도시의 공공도서관에서 뉴욕타임즈의 1면을 장식한 촛불시위행렬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조그마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전까지 어떤것에 대해서도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자 하지 않았다. 나는 겁이 많았고, 아는 것은 너무나도 적은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나의 판단조차 믿을 수 없어 무엇이 옳고 그름을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사상적으로 과잉보호아래 성장한 온실속의 화초 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부조리한 대우는 마르크스가 세운 정교한 사회 시스템에서 생기는 단순한 에러라고 생각했다. 매우 어리석었다. 그러한 시스템은 기계처럼 계획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어떤 힘에 의해 불순한 의도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분노와 공포 앞에 체념하고만 있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가 싫었었다. 그의 정치 방향의 대부분은 혁신을 향한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언제나 단호하게 호통치는 경상도 사투리의 어투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경상도 출신의 가부장적인 단호한 말투를 지닌, 내가 싫어하는 어른상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그가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내가 어릴적부터 배신감을 느끼던 고향의 '꼰대'들을 무의식중에 떠올린 것 같다. 경상도 사투리는 정감 있는 말투가 아니다.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말투이다. 따뜻하고 배려 섞인 말은 하나도 있지 않은 건조한 말투의 대통령을 나는 이유도 모른채 싫어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가 어떤 일을 하려 했는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대부분의 이야기는 공감이 갔지만, 말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에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한겨레21의 표지를 말없이 바라보고는, 전철 키오스크에서 집게에 걸린 하나남은 잡지를 사 들고 왔다. 한겨레21은 유난히 조용했고, 그 안에는 흑백의 미소로 손을 흔드는 대통령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문득, 그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서 봉하마을로 내려갔던 때가 생각이 났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주민들을 앞에 두고 전 대통령은 아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감정에 벅차올라 말하는 걸 텔레비전에서는 처음 봤던 것 같다. 모든 짐을 내려 놓았다고,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때보다 기쁘다고 말하는 그는 얼굴은 환히 웃고 있었고,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것 같은 긴장이 서려있었다. '그럼 이 때까지 대통령하는 동안은 어떤 느낌이었다는 거야.'라는 심드렁한 말투로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격양되어 있었고, 마이크를 타고 나에게까지 그 기쁨이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한국은 이래서 안된다'라는 나쁜 가치관과 싸우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물론,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손을 놓아버린 부분도 많다. 그리고, 자신의 변혁 이후를 생각하지 못해 미래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실수도 있다. 하지만, 전 대통령의 시도는 그 동안 우리가 어떤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었다는 걸 일깨워 주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산을 올라가면서 그가 느꼈을 절망은 얼마나 컸을까. 항상 집 뒤에 있던 그 바위 위에서 서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는 않았을까. 나라의 대통령을 했고, 변호사 출신으로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보려 했을지 모른다. 그를 그 바위위에서 떨어지도록 만든 것은 그가 결코 머리가 나빠서도, 충동적이어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그것 이외에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끔 만든 무언가가 있어였을 것이다.

하루 아침에 바뀔리는 없겠지만, 이번 한겨레21을 사 들면서,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한겨레21도 사서 보고, 새로 발행된 르몽드 디플로마띠끄도 보면서, 인터넷 뉴스의 자극적인 제목과는 좀 다른 시선을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우리가 네이버와 다음의 뉴스 섹션을 포기하면, 좀 다른 세상이 보인다. 8자가 채 되지 않는 포털의 주소 너머에는 읽어야 할 책들도 들어야 할 사람들의 말도 많이 있다. 단지, 모니터 너머와 매일 오가는 출퇴근 버스 안의 상황 말고도 세상에는 기뻐하는 것과 고통받는 것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심하게 관찰해 책을 낸 학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 분이 남긴 유서는 아주 짧은 것이었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에게 하는 설명치고는 너무나 적은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어쩌면, 해답을 우리가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분이 그 바위에서 뛰어내렸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도, 북받쳐오르는 슬픔도 모두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들을 향해 써야 할 것이다. 부디 평안히. 남은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